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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의 100일 단식, 희생인가 폭력인가?

단식 중 방문한 청와대 문재인 수석을 내려다보는 지율 <사진제공: 브레이크뉴스>

조영환 대표 | 기사입력 2005/02/08 [19:02]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 희생인가 폭력인가?

단식 중 방문한 청와대 문재인 수석을 내려다보는 지율 <사진제공: 브레이크뉴스>

조영환 대표 | 입력 : 2005/02/08 [19:02]


환경운동가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 희생인가 폭력인가?

광신적 자기희생(fanatic self-surrender)과 강압적 자기주장(coercive self-assertion)은 동전의 양면.

최근 지율이란 여승은 '도롱뇽 살리기'의 기치로 천성산에 고속전철 통과를 막기 위해서 100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 여승은 정부와 국민들을 굴복시켰다. 정부는 2월 3일 '천성산 환경영향조사 결의안'을 채택하고 민관 공동조사 결과에 합의하지 못하면 대법원의 판결에 따른다고 합의를 했다. 많은 언론들도 100일 간이나 단식한 그 여승의 희생적 환경보호 노력을 찬양했다. 몸을 불사르는 데 내어주면서 생명과 자연을 사랑하는 지율스님의 위대함에 어느 언론이나 개인이 감히 지율의 단식을 비판하랴?

그러나 나는 100일간 단식했다는 그 지율이란 여승의 후진성, 이기주의, 폭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여승이 100일간 단식했다는 주장은 정치꾼들이 사용하는 대중속이기이다. 그 여승은 단식이 아니라 다만 약간 절식을 했을 뿐이다. 인간은 50일을 물리적으로 단식하기 어렵다. 좀더 충격적인 행위나 사건으로 군중들에게 신비감을 조장하는 행위는 일종의 우상화작업이다. 지율을 우상화하여 활용하려는 환경단체는 군중선동의 수법을 버려야 한다. 지율은 100일 동안 단식한다고 언론과 국민을 속인 행위에 대하여 먼저 사과해야 한다. 지율을 이용하여 대구-부산간 고속전철공사를 지연시킨 그 환경운동가들은 환경보호 이전에 인간양심에 폭력을 가한 행위에 대해서 먼저 국민들에게 사죄해야 옳다.

그 다음,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 걸고 획득한 지율의 승리는 정부와 국민들에게 독선적 게임의 규칙을 주입시켜 주었다. 목숨을 걸고 생떼를 부려야 찬반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반민주적 승부수는 독재시절에 민주투사들이 자주 사용하던 비민주적 의지관철 수법이었다. 사실 분실자살이나 단식투쟁은 비상한 상황에서 정의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 정당화된 최후의 수단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목숨을 걸고 지킬 명분과 이익이 있을 것이다. 사회적 혹은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마지막 수단에 의존하여 자신의 명분과 이익을 지키려는 충동에 쉽게 휩싸인다.

지율의 단식농성으로 인하여, 분신자살이나 단식투쟁이 다시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는 느낌도 받는다. 작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자, 구둣가게 아저씨였던 백모씨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를 주장하기 위해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을 기도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 최근 1월 22일 현대자동차 비정규노조원인 최모씨가 정규직 노조사무실에서 분신을 기도하여 2도 화상을 입고 살아남았다고한다. 이러한 분신자살은 옛날 평화시장의 전태일의 분실자살로부터 우상화되기 시작하였다. 방송을 통한 스타가 탄생되는 '연예인 문화'의 시대에 단식이나 분신의 유행은 사회적 유행병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목숨을 건 투쟁을 존대받아왔다. 식민지 통치를 대대로 겪은 한국역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개인들이 목숨을 버리는 투쟁방식은 상당히 명분있었다. 무력으로 민족의 존재를 박탈한 외세나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독재에 대항하여 살아남아 온 한국인들에게 극단적인 행동방식인 불굴의 자기주장이나 광신적 자기희생이 최고의 미덕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다. 개개인이 확신에 찬 투사나 영웅이 되어야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억압과 통제에 대항할 수 있었기에, 분신, 단식, 자결 같은 최후의 저항방법은 엄청난 불합리한 상황에서 오히려 합리적 반응일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와 권리가 보장된 민주적 사회에서는, 목숨 건 투쟁이나 지조있는 주장은 개인의 완고한 자기집착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구의 비판도 초월해 보이는 지율스님의 자연사랑을 위한 단식행위는 단지 변동사회의 사회적 병리증상일 수도 있다. 지율이 100일단식으로 보여준 자살적 자기희생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한 변동사회의 병리증상의 하나인 공격적 자기주장(aggressive self-assertion)으로 보여 진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유한한 사람들이 상대적 합리성을 놓고 경쟁하는 민주사회에서 극단적 자기포기는 극단적 자기주장의 변형된 모습일 뿐이다. 자결이나 분신은 사랑을 가장한 자신과 남들에게 폭력이다. 유한한 사람들이 모인 민주적 사회에서 절대선으로 무장한 의인은 곧 악인이 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현대국가로 넘어가는 개발도상국가의 군중심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개인들의 분신자살이나 집단의 횃불시위가 얼마나 나쁜 사회적 병리증상인지를 잘 알고 있다. 오르테가 가세트. 에릭 호프, 구스타브 르봉 등 군중심리를 연구한 학자들은 가치관의 중심을 잃은 변동사회(changing society)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미혹과 선동에 취약한지를 잘 지적했다. 우리가 겪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은 전통사회가 붕괴되는 변동사회의 병리적 증상일 수도 있다.
변동사회의 군중들은 자극적인 충동에 약하다. 군중들은 불꽃시위와 분신자살에 약하다고 스페인의 사회학자 구스타보 르봉은 말했다. 베트남 언론은 이 두 이념이 충돌할 당시에 분신자살한 스님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장면을 활용해서 미국의 엄청난 무력을 무력화시킨 적이 있다. 그래서 모든 군중 선동가들은 야간에 횃불시위나 촛불시위를 활용한다. 한국에서 촛불시위는 저당도 횃불시위이다. 횃불시위에 더하여 분신이나 단식도 군중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선동방법이다.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기 위해서 광신적 희생의 방법을 택하는 해결방식은 순간적으로는 화려한 승리를 거둘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자신과 사회를 해친다. 한국사회는 지금 혁명의 시대가 아니다. 한국에는 혁신을 즐기는 유토피안들의 한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지지세력들이 진정한 경제회복과 사회발전을 바란다면, 지율스님과 같이 생떼 쓰는 유토피안들에게 끌려가면 안 된다. 아무리 좋은 환경보호나 인간사랑도 토론이 아닌 강압으로 구현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유토피안들의 온갖 방자함은 건설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한 이데올로구들의 억압보다 더 문제가 많을 수 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강요나 자해의 투쟁방식은 폭력으로 규정된다. 자유와 민주가 지나치면 파괴와 해체에 다름아니다.

자연파괴에 익숙한 현대문명에 몸으로 저항한다는 지율스님의 명분은 찬양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과 환경의 이름으로 심약한 한국인들의 양심에 타격을 가한 지율스님의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극단적인 희생으로 조직의 승리를 이끌려는 투쟁방식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문민정부나 참여정부에서 그 한계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한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의 주도적 인사들은 광신적 자기희생과 강압적 자기주장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환경보호를 빙자한 지율의 100일 단식의 실체를 현정부는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경보호의 명분으로 강행된 지율의 단식은 현 정부와 언론에 의해서 크게 부각된 느낌이다. 자기확신에 익숙한 정부가 자기확신에 빠진 지율을 키운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정치적 혹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단식하고 자살하는 현대시대가 지나면서, 자연보호 때문에 단식하고 자살하는 후기현대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이념을 숭배하던 시대가 지나면서, 좌파 운동가들은 여성주의와 환경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서 호주제가 파괴되고 새만금사업이 중단된 것은 좌파적인 현정권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급격한 가정해체와 과도한 환경보호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는 자결이나 분신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협박이다. 민주주의는 목숨 걸 진리를 누구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전제하는 정치제도이다. 인간은 모두 부분적 진리만 가진 존재라는 민주적 사고방식은 선동이 설치는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잘 작동되지 않는 모양이다.

좋은 명분만, 내세우면 독재적 행동을 해도 용납되는 것이 한국사회인 것 같다. 주체적 자기주장과 독선적 자기아집의 차이를 우리들은 구별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깊은 지식과 담담한 심지를 가지지 못한 한국 언론인들은 한국사회를 소란하고 혼탁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인지 모른다. 선정적이고 경박스러운 한국언론은 민주사회에서 도룡뇽과 지율의 100일 단식에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경박한 언론이 경박스러운 사회를 만든다.

모든 국민과 언론이 환경운동가 지율의 단식을 찬양할지라도, 나는 그 여승의 단식투쟁을 무지한 군중들을 호리는 폭력행위로 본다. 광적인 자기포기는 강압적 자기주장의 폭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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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gdp tznjpxvmk 2008/02/19 [04:03] 수정 | 삭제
  • iqrgo efgmhn tmpklr cajxdnuq egziv huzoyisne dwkflozqt
  • ... 2005/02/12 [14:02] 수정 | 삭제
  • 비구니의 다이어트계획에 국가정책이 바뀐다.... 어허~~ 붓다가 과연 기뻐할런지...
  • 무수리 2005/02/10 [10:02] 수정 | 삭제
  • 진정 지율스님이 필요로하는 자리는 천정산이 아니라 독도입니다....스님 지금 독도로 저와 같이 갑시다.....
  • 이 시대 2005/02/07 [19:02] 수정 | 삭제
  • 국승 사명대사가 일본 왜놈들과 대적하여 나라를 지키고 금강산에서 열반하였다.자고로 스님은 스님다워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
  • 독도수비대 2005/02/06 [14:02] 수정 | 삭제
  • 국가가 위험할때 호국 스님들이 나라를 구했다. 나라를 구할때 나서는 스님이 지율 여자가 나타나 국책을 뒤 흔들고 있다. 호국스님들의 명예를 더럽피는 이런년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돌로 쳐 죽여야 한다.
  • 쌍년 2005/02/06 [01:02] 수정 | 삭제
  • 지율년이 부처님을 속이고 국민을 속이고 있다. 100일 단식에 살아남으면 기네스 북에 기록되는 사기가 된다. 아래로 내녀 까는 눈빛으로 부처를 속이고 국민에게 사기치는 년의 눈빛이다.
  • 타임즈독자 2005/02/06 [01:02] 수정 | 삭제
  • 희대의 사기를 치는 미친년!
  • 안씨 2005/02/05 [23:02] 수정 | 삭제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상스러운 조짐이다. 열린 사람들, 구도자 가면극이 한데 어울려 극치를 이룬다. 단식 100일은? 부활 없신 육신으론 불가능하다.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다. 하지만 신문은 승전고를 울린다. 모두가 도깨비에 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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