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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넘어 사법고시 합격한 주재현 변호사!



장남으로서, 가난과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

아버지는 아프고. 고학으로 마흔 넘어 사시 합격

30년 전, 학생들에게 월간영어를 배달하며 학비를 벌던 고학생 출신 주재현 변호사다.

 

“제 고향은 울진군 북면 하당리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되었지만, 예전에 하당리는 울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외진 산골이었다. 그곳에서 18살에 결혼한 부모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에는 부모와 조부모님 그리고 증조부모까지 계신 대식구였다. 태어나서 6개월이 지날 즈음 가난한 젊은 어머니는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한겨울에 겨우 모포 한 장을 덮은 채 화성리 꽃방 친척 집 결혼식에 갔다. 독감에 걸린 아기는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관절에 결핵균이 침투했고 그로 인해 한쪽 다리는 평생 불구가 되고 만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관절 장애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땔감으로 솔방울을 따다가 산에서 굴러 아픈 다리가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1년을 증조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다리 관절에서 고름이 흘렸다. 헝겊으로 둘둘 감아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까지는 부모님이나 이웃 사람들이 업어서 데려다주거나 혼자 깨금발로 뛰어서 다녔다. 집에서는 증조모가 아픈 부위를 씻고 고름을 짜내어 새 헝겊으로 싸매어주었지만, 등하굣길에도 헝겊에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기 위해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냇가로 내려가 수시로 응급처치를 하곤 했다. 곪은 부위가 썩어서 여름에는 심한 냄새와 상상조차 힘든 고통이 따랐다.

 

4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고름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가 안으로 완전히 굽어 붙어버린 상태였다. 고통은 점점 더해져 결국 1차 수술을 하게 된다. 아들 보다 겨우 20살이 더 많은 젊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은 미어졌지만, 가난한 집안에 부모와 조부모님 그리고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두고 어른들에게 몇 마지기 되지도 않은 농토를 팔아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중소까지 키워 팔아 아들 수술에 나섰다. 분천역에서 열차를 타고 철암에서 탄광에 다니는 외삼촌 집에서 하루를 묵고 중앙선을 타고 청량리에 도착, 세브란스 병원에서 비로소 수술을 받아 다리를 고정 시 켰다. 그때가 4학년, 완전한 치료는 이미 늦은 나이였다. 또한, 젊은 아버지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에서는 2명만 중학교에 진학했다. 주변에서는 장애인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서 뭐 할 거냐며 시계 고치는 기술이나 배우게 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냈다. 곤궁한 형편이라 하숙을 얻지 못하고 자취를 했다.

 

그마저 방값이 비싼 학교 근처는 엄두도 못 내고 학교에서 1㎞ 떨어진 곳에 아는 집이 있어 방을 얻었다. 불편한 몸으로 공부도 힘들었고 워낙 산골에서 온 처지라 울진읍 내 학생들에게 주눅이 들어있는데 의외로 첫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아주 작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즈음 하당리에도 토요일 오후에 한 번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한번 버스가 운행되었는데 하당에서 죽변을 거처 울진으로 가는 버스였다. 읍내에서 자취하던 학생들도 토요일이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월요일 아침 버스로 등교했다. 버스를 놓치면 울진까지 12㎞를 걸어서 가야만 했다.

 

한번은 월요일 등굣길에 죽변에 이르기 전 범상 골에서 버스가 고장이 났다. “그 불편한 다리로 범상 골에서 죽변으로, 다시 울진까지 걸어서 학교에 도착하니 4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생했다고 다독였다. 아버지의 결핵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픈 다리로 자꾸 걷다 보니 한쪽 다리가 들릴 정도로 점점 활처럼 휘어졌으나 용돈 한 푼 받아본 적 없는 형편으로 자전거를 사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다행히 중3 때 문교부에서 실시한 표어 공모전에 가작으로 당선되어 당시 돈으로 1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세금 3천 원을 제하고 7천 원으로 자전거를 샀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배워야겠다는 열정은 접을 수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춘기 열병이 지나고 있었으나 3명의 동생과 결핵으로 오늘내일하는 아버지 앞에서 슬픈 내색조차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월간영어를 주문받아 몇 푼의 수수료를 모아 학비를 보탰다.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수학여행비를 대신 내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고마운 분들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공부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하려고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삼촌 숙소에 얹혀살게 되었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와 함께였다. 그 친구에게도 다리가 장애인 동생이 있어 누구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막역한 관계로 지낸다. 나이 겨우 두 살 더 많은 삼촌은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오래 머물러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삼촌이 공장에서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삼촌 역시 어린 나이라 감당키 힘든 시련을 술로 달랠 수밖에 없었고, 제가 기댈 형편이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함께 상경했던 친구는 결혼한 누나와 매형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경북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지금은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형편이나 신체적인 고통으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어요” 교사가 될 생각으로 그 와중에도 경북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미 심하게 휘어진 다리는 땅을 밟으면 몸이 기울어 걸음을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동서울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권유했다.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수술대에 오르고 싶었지만 80만 원이라는 거금의 수술비가 없었다. 치료비가 저렴하다는 소문을 듣고 전남 여수 애양재활병원으로 갔다. 선교사가 설립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해오던 병원이었다. 정밀검사에서 양쪽의 다리 길이가 6센티나 차이가 났다.

 

결국, 두 다리 모두 절단 후 재접합 수술을 받았다. 그러자니 3개월 동안 입원할 수 없었고 퇴원을 하고 보니 가을학기 복학신청을 놓쳐버린 것이다. 3개월 공부한 뒤 전액 장학금을 기대하고 동의대학교에 시험을 봤으나 전체 차석으로 그마저 힘들게 됐다. 그때 울산공고를 졸업한 동생과 함께 1982년 한 해 동안 이웃한 큰 외가댁 골방에서 공부에 몰두해 83학번으로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다.

 

법대합격이 고시 합격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포기하고 중견기업에 취업도 해보았으나 내적 갈등에 그마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결핵은 신약이 더 이상 듣지 않을 정도였고 한쪽 폐의 절반으로 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가난과 싸우며 1차 합격이 3번 지나는 동안에도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했고. 빚더미 위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한 레이스는 계속되었다. 공부만 계속할 형편도 못되었다. 평소에는 학비를 벌다가 시험 6개월을 앞두고서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세월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기고 2004년 드디어 결승선이 발아래 지나고 있었다. 그때 제 나이가 마흔을 넘고 드디어 사법고시 합격하고 보니  “고향 울진에 플래카드가 26장이나 걸렸어요. 하하” 고시 합격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개업하고 얼마간 법무법인을 유치하자면 또다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 얼마간의 월세를 부담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에 사는 울진군민들이 좋은 일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기부한다. “고향 분들 덕분에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요. 울진에 도움이 된다면 힘이 돼 드려야지요.” 주 변호사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병의 위중에 따라 대학병원을 찾기도 하고 동네 병원에서 먼저 진료를 받기도 한다. “처음 다리가 아팠을 때 바로 울진 동네 병원에 가서 조처했더라면 내가 그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요. 법률 진단도 마찬가지이요”라며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당신의 질병에, 장애인 장남에, 여기저기 빚을 내는 것조차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짊은 시절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했던 게 많이 후회돼요”라고 했다.

 

주재현 변호사님의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그 힘의 원동력은 성실함과 인내심, 그리고 지난날 자신에게 도움을 주신 많은 분에게 보답하는 길이 공부라고 생각하며 마흔을 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기쁨보다도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는 오늘도 서민의 품에서 길을 찾고자 더 크고 높은 도전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 주재현 변호사  © 신영숙 기자
 

[주재현 변호사 프로필]

주재현 변호사 57세 (만 56세)

출생:1963년 5월 24일

출생지: 경상북도 울진

변호사,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 민원상담센터(변호사)

연락처:010_4285-9665 사무실 02)585-5200 E-mail jj1728@naver.com

 

학력 사항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 공정거래법 석사(2019년)

부산대학교 법학과 졸업(1988년)
 
올진 종합고등학교졸업(1980년)

울진중학교 졸업(1977년)

 

경력 사항

(전) 재경 울진 중·고 총 동문회장

(전) 새누리당 중앙장애인위원회 위원

(현) 자유한국당 법무행정 수석부위원장

(현) 자유한국당 법률자문위원

(현) 대한변호사협회 사법평가위원

(현)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 민원상담센터(변호사)

(현) 변호사

 

온갖 풍파 후 맑고 빛나는 가을 하늘

법률사무소 진우 주재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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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바르게 서려는 긴장이다.
만에 하나, 이번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가 사법개혁의 선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최악의 패착이 된 것이다. 우선은 국민들이 검찰의 광기를 목도했다. 그리고 검찰은 스스로 극단의 목표를 정하고 불나방이 되었기에 사법개혁 추진 주체와의 협상력을 상실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비롯해 공수처 설치, 직접 수사 폐지, 혐의사실 공표 금지, 강제 수사 축소라는 엄중한 역사의 칼 앞에 무장해제 된 것이다. 우리는 칼춤을 추며 이른바 본때를 보이는 검찰의 행태가 낯설지 않다. 시류에 편승하거나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기로에 설 때마다 보였던 행태 아니던가? 빌미만 잡히면 행정부도 입법부도 무릎 꿇릴 수 있다는 제왕적 사고방식, 그러면서도 일극 중심의 무자비한 정권에는 알아서 기며 공안정국의 중심이 되었던 검찰이 아니던가? 반면, 지극히 합리적이며 민주적이어서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정신에 투철한 정권은 검찰권력에 대한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착한 정권은 검찰의 행태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고 있다. 할 수 없어서 그러겠는가? 적폐정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참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검찰이 3권을 장악할 유일한 길은 문재인 정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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